| <내 안에 숨겨져 있는 것들> - 화진포 여행을 다녀와서 뭐뭐 씨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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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죠?
저는 얼마 전, 슈퍼맨 티셔츠를 입고 온 슈퍼걸과 1박 2일 화진포 여행을 잘 다녀왔습니다. 뭐뭐 씨가 내줬던 숙제 <자연 속에 숨어 지내는 멋진 친구들 찾아내기>를 하느라 조금 낑낑거리기는 했지만요. 슈퍼걸은 휴가 중 임에도 불구하고, 몸에 밴 직장인의 리듬 때문에 완전히 쉬지는 못했습니다. 중간 중간 시계를 보면서, ‘지금 이 시간 직장에 있었더라면 < ~을 하고 있겠지>'라는 혼잣말을 했습니다. 몸은 떠나왔지만 마음에 직장을 담아 온 격이었습니다.
우리의 여행은 시작부터 좋았습니다. 속초행 고속버스를 ‘일반표'로 예매했는데 우등고속버스를 타고 갔으니 말이에요. 이유인즉슨 저희가 여행가는 날부터 운행시간표가 바뀌어서 버스 배차가 달라진 것이었죠. 그냥 타고 가라는 기사님의 말에 쾌재를 불렀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었습니다. (^^)v
4시간 후에 속초에 도착했고, 다시 1시간 넘게 시내버스를 타고서야 화진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화진포는 금강산을 뒤 배경으로 하여 바다와 호수를 동시에 볼 수 있으며, 고인돌 유적지나 해양박물관,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 별장까지 등 볼거리를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혹시, 영화 <콘택트>를 보신 적이 있나요? 영화 후반부에 눈앞에 펼쳐진 은하계를 보면서 조디 포스터가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제게는 화진포가 그러해 보였습니다. 비록 야자수도 없고 달도 하나만 뜨는 곳이지만 늠름하게 뻗은 소나무 숲과 갈대숲, 드넓게 펼쳐진 하얀 모래밭이 화진포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니깐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으면 조선시대 풍류시인 김 삿갓이 화진팔경을 읊고 옛 권력자들의 별장이 모두 이곳에 있겠습니까? 특히나 약 4천∼4천5백 년 전 후빙기에 들어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졌다는 화진포 호수는 바닷물과 민물이 동시에 만나 생태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 화진포 호수에 자리 잡은 팬션을 바라보며 슈퍼걸과 사진 한 방을 박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밤이슬을 피할 민박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본격적인 관광 철이 시작되지 않은 탓인지 마을은 한산했습니다. 대신 동네 아주머니들이 바다에서 따온 미역들이 길과 집 앞 마당들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머물 곳은 좀 천천히 찾아보기로 하고 미역 사진들을 찍어댔습니다. 뭐뭐 씨가 내준 숙제의 한 풍경이 아닐까 해서요.
▲ 길과 마당 등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미역들 "거, 뭐 미역들만 찍지 말고 우리도 찍어."
누군가 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마을 어르신이었습니다. 동네 분들이 모여 미역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 요즘엔 초상권 문제가 있어 사람들 모습을 찍기가 쉽지 않은데 웬 횡재입니까? 찍은 사진을 보내드리기로 하고선 신나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엔 어르신들이 ‘그만 찍어~'라고 손 사레를 쳤지만요.
"처녀들이 시집 안 가고 뭐해? 이러니깐 농촌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지. 요즘 사람들, 땅 보러 다니잖아. 뭐 하러 그래? 농촌으로 시집오면 되지. 여기 총각들 다 부자야. 거기다 여기에서 살면 돈도 별로 안 들어."
그래도 노처녀들이 환영을 받는 곳은 농촌뿐인가 봅니다. 한 아주머니는 커피를 타 주면서 ‘오늘 밤에 선 볼 테야?'라며 은근슬쩍 찔렀습니다.
"글쎄요, 아직 입신양명을 안 해서요. 호호호" "그런 거 하지 말고 시집가는 공부나 해라."
세상에 시집가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하니 ‘그래 시집가기 전에 실컷 돌아다니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결혼해서 애가 생기면 어디에도 못 돌아다닌다고요.
슈퍼걸과 저는 한참을 돌아다닌 후, 가장 맘에 드는 민박집을 찾아냈습니다. 마당 곳곳엔 사장님이 정성스럽게 가꾼 튜울립들이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폼 나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한창 성수기 때는 10만 원 짜리 방이라는 데 저희는 2만 원만 내고 머물 수 있었습니다. 
▲ 민박집 멋지죠? 다음엔 뭐뭐 씨도 함께 와요. 짐을 풀고 나니 오후 3시였습니다. 긴장이 풀어지니 배가 고팠습니다. 동네 식당을 눈 씻고 찾아보니 황태국밥과 막국수를 먹을 수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쌍둥이 할머니들이 구순 넘은 친청 어머니를 돌보며 식당을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세 명의 아들들이 있다고 해서 순간 긴장했는데 다행히 다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며느리들이 일 좀 도와 주냐고 물으니 모두 ‘비단'같아서 뭘 배우러 다니느라 일 도와줄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아들들이 배달을 나가며 어머니 일을 도운다고 합니다. 허기진 데다 맛난 반찬들을 먹으니 공기밥까지 추가하게 됐습니다. 배의 겹살이들이 편마암을 이룬다 해도 당시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더군요. 더욱 신났던 것은 공기밥이 보너스였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너무 복스럽게 먹어서 불쌍해 보였나봅니다.
배도 채웠겠다, 본격적인 관광과 숙제 해결을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더벅머리 학생을 만났습니다. 덩치는 산만한데 가방은 초등학생용을 메고 있었습니다.
"저기요, 집에 가게 돈 좀 빌려주세요."
그 아이의 말이 진실일까, 아닐까 순간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식당 할머니에게서 거저먹은 공기밥값을 이 아이에게 주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베풂을 이 아이를 통해 나눔으로 전달한 격이었죠. 그 아이도 우리의 베풂을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하기를 바라며 아이와 헤어졌습니다.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져 만들어졌다는 백사장을 맨발로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걸었습니다. 김일성 별장도 가보고 이기붕 별장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이사이 공간들 속에서 내가 발견해야 할 자연 속의 친구들을 찾아보았지요. 아무리 봐도 심심하지 않은 에머랄드빛 파도일까, 모래사장에 있는 조개껍질일까, 소나무 숲 사이에 저 혼자 가만히 피어있는 꽃들일까.
▲ 화진포의 식구들 :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으로) 모래 위에 찍힌 갈매기들의 발자국, 파도소리, 소나무 길, 숲 속에 피어있는 작은 꽃들
화진포 호수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슈퍼걸과 수다를 떨었습니다. 때로는 스타카토로 말하고 때로는 사분쉼표로 쉬어주면서. 슈퍼걸은 지난 2년 동안 겪었던 직장에서의 맘고생이 심했나봅니다. 이 곳 사람들이 화를 내지 않는다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직장 사람들이 그렇게 화를 내냐고요.
"꼭 말로 화를 내야만 아니? 눈으로, 코로, 몸짓으로 나 불만 있다, 건드리지 마라, 폭발 한다고 그러지."
그러면서도 아이 놓고 집 나온 엄마처럼 직장걱정을 하더군요. 노을이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고 나니깐 다른 풍경들이 확 들어온다."
슈퍼걸의 말처럼 아닌 게 아니라 그랬습니다.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풍경은 그 깊이를 더했습니다. 그 모습을 제 자신에게 비추어보니 저도 어느 것 하나만 바라보다 그 주변에 있는 귀한 것들을 놓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제 모습 때문에 현재의 제가 외면했던 가까운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  | | ▲ 노을이 있을 때의 화진포호수 풍경 | ▲ 노을이 졌을 때의 화진포호수 풍경 |
저녁은 민박집에 와서 해 먹었습니다. 참치 김치찌개가 주요 식단이었는데 참치만 가져왔더군요. 김치를 살 요량으로 사장님에게 말했더니 그냥 먹으라고 한 접시 주었습니다. 약과와 마른 오징어까지 보태서요. 나중엔 반찬으로 미역부각까지 줬는데 감동 이백만점 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해 뜨는 것을 보고 싶다고 시간을 물어보니 새벽 5시에 깨워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번 사장님을 말려야 했습니다. 사장님은 우리가 미안해서 사양하는 줄 알았던 거예요. 사실은 슈퍼걸이 새벽기도에 가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사장님은 수긍했죠.
잠들기 전, 슈퍼걸과 저는 집에서 가져 온 책을 잠시 읽었습니다. 슈퍼걸은 <미운오리 새끼의 출근>을,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책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상황에 맞는 책을 가져왔다고 깔깔댔지요.
제 책을 보니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은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실체, 즉 ‘생각하는 자'가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기 시작할 때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깨어납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이러다 자아 분열하는 것이 아닐까도 싶었고요.
책을 접고 슈퍼걸을 바라보니 벌써 잠들어 있었습니다. 안경을 낀 채 책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여우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무언가 불안한 사람처럼, 쫓기는 사람처럼 잠을 잤습니다. 제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니, 슈퍼걸이 갑자기 "지금, 교회 갈 시간이야?"라고 물으며 발딱 일어났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니 슈퍼걸은 금방 다시 잠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온라인취업사이트<사람인>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직장인 96.7%가 퇴사충동을 느낀다던데 슈퍼걸과 같은 직장인들이라면 정말 퇴사충동을 느끼고 싶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슈퍼걸이 가져온 책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책을 휘리릭 살펴보는 데 안데르센의 말이 눈에 꽂혔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시작이다."
어떻게 하면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화진포에 숨어있는 친구들처럼 제 안에 숨겨져 있는 것들도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